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 정부/평가/부정적 평가/정치 (문단 편집) === [[체육관 선거]] === 박정희는 직접적으로 자신이 '종신 대통령'이라고 선언하지는 않았지만,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에서 간선제로 바꾸며[* 사실 [[미국 대통령 선거]]와 한국의 [[대한민국 국회의장|국회의장]] 선거도 간선제로 치르는 것에서 볼 수 있듯 간선제 자체는 비민주적인 방식이 아니며, 대다수의 독재국가의 (요식행위에 가까운) 지도자 선거들도 직선제로 치른다. 진짜 문제는 박정희가 실시한 간선제가 '제대로 된' 간선제가 아니었다는 거다. 비슷하게 [[수하르토]], [[장제스]], [[장징궈]]도 선거에 단독 후보로 출마해 의원들의 간접 선거로 100% 득표율을 기록하며 보여주기식 투표를 했다.] 자신을 사실상의 '종신 대통령'으로 만들었다. 제4공화국 시기 대통령 선거는 [[통일주체국민회의]]가 시행했는데, 이들은 [[장충체육관]]을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회의장으로 쓰며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. 이 때문에 '체육관 선거'라는 말도 나왔다. 유신 개헌 직후인 1972년 12월 23일에 치러진 [[제8대 대통령 선거]]에서는 투표에 참여한 2,359명 중 무효표가 2표만 나와 '''99.92%'''라는 득표율이 나왔으며, 박정희 생애 마지막 대통령 선거인 [[제9대 대통령 선거]]에서도 투표에 참여한 2,578명 중 무효표가 1표만 나와 '''99.96%'''의 득표율이 나왔다. 참고로 두 선거 다 박정희가 '''단독 후보'''로 나와 치러졌다. 사족으로 박정희가 처음부터 장기집권을 염두에 뒀다는 증언이 있다. [[5.16]] 정변 세력에 의해 추대된 [[장도영]]에 따르면, 쿠데타 이후 민정이양을 두고 '''박정희는 무기한을 주장'''했다고 하는데, 미국이 정권 인정의 대가로 기한 명시를 주장함으로써 좌절되었다. 그러나 이런 박정희의 야망은 10월 유신으로 현실화되었다.[* 장도영, "나는 역사의 죄인인가." 한국정치문제연구소편, 『政風3: 누가 역사의 증인인가!』 창민사, 1986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